한국에서의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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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에서의 학살》은 파블로 피카소가 제작한 반전 회화 연작 중 하나로, 한국 전쟁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이 그림은 1950년 한국에서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을 묘사한 것으로 추정되며, 프란시스코 고야의 《1808년 5월 3일》에서 영감을 받아 전쟁의 잔혹함과 민간인 희생을 표현한다. 작품은 군인과 민간인의 대립을 통해 폭력성을 강조하며, 1951년 처음 공개되었을 때는 호평을 받지 못했지만, 현재는 피카소의 중요한 평화주의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2022년에는 멸종 반란 활동가들이 이 그림을 훼손하려 시도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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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의 학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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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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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한국에서의 학살 |
원어 제목 | 프랑스어: Massacre en Corée |
화가 | 파블로 피카소 |
제작 연도 | 1951년 |
종류 | 유화 |
매체 | 합판에 유채 |
크기 | 높이 110 cm, 폭 210 cm |
소장 | 말라가 피카소 미술관 (말라가) |
2. 배경
피카소는 한국 전쟁 당시 발생한 민간인 학살을 고발하고자 '한국에서의 학살'을 제작했다. 이 작품은 제목에서 한국전쟁을 직접 언급하지만, 특정 시기나 장소를 명시하지 않아 주제는 모호하다.[4]
피카소는 평생 동안 전쟁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는 그의 작품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스페인 내전은 '게르니카'를 그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점령된 파리에 거주하면서 전쟁의 참상을 목격했고, 전후에는 반전 이미지와 평화의 상징을 담은 작품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표현했다.[5]
2. 1. 한국전쟁과 민간인 학살
이 그림은 1950년 7월에 발생한 노근리 학살과 유사한 사건을 묘사한 것일 수 있는데, 당시 불특정 다수의 남한 피난민이 미국 육군 병사들에게 학살당했다. 또는 같은 해에 북한 황해남도 신천군에서 자행된 대량 학살인 신천 학살을 묘사한 것일 수도 있다. ''한국에서의 학살''은 반공주의 세력에 의해 민간인이 살해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미술 평론가 키르스텐 호빙 킨은 이 작품이 한국에서 일어난 "미국의 잔학 행위에 대한 보도"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말한다.[8] 약 109.22cm × 약 208.28cm 크기인 이 작품은 그의 ''게르니카''보다 작으며, 개념적 유사성과 표현적 격렬함을 공유한다.[7]피카소의 작품은 프란시스코 고야의 그림 ''1808년 5월 3일''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 그림은 나폴레옹 1세의 명령에 따라 스페인 민간인을 처형하는 요아킴 뮈라 휘하의 프랑스 군인들을 보여준다.[8]

''5월 3일''과 마찬가지로 피카소의 그림은 두 개의 뚜렷한 부분으로 나뉜 이분법적 구성을 특징으로 한다. 왼쪽에는 집단 무덤 기슭에 위치한 나체의 여성과 어린이가 보인다. 오른쪽에는 무장한 "기사"들이 서 있는데, 이들 역시 나체이지만 "선사 시대 거인과 유사한 거대한 사지와 단단한 근육"을 갖추고 있다. 사격 부대는 고야의 그림처럼 뻣뻣하게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피카소의 묘사에서 이 집단은 혼란스러운 모습이다. 이는 갑옷을 입은 병사들을 묘사한 그의 드로잉과 석판화에서 자주 나타나는 모습으로, 전쟁의 어리석음에 대한 조롱의 태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들의 헬멧은 기형적이며, 그들의 무기는 중세 시대부터 현대 시대에 이르는 공격 수단의 혼합물이다. 총도 창도 아닌, 촛대에 가장 가깝다. 더욱이 병사들은 모두 성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러한 표현적 특징은 패널 왼쪽에 있는 여성들의 임신 상태에 의해 강조된다. 많은 관람객들은 생명을 파괴하는 역할을 하는 병사들이 총으로 성기를 대체하여 스스로를 거세하고 다음 세대의 인류의 삶을 박탈했다고 해석했다. ''게르니카'' 및 ''해골집'' (1944–45)과 함께 이 작품은 피카소가 자신의 시대를 묘사하기 위해 구성한 작품 중 하나이다.[9]
3. 작품 설명
이 그림은 1950년 7월에 발생한 노근리 학살과 유사한 사건이나, 같은 해 북한 황해남도 신천군에서 벌어진 신천 학살을 묘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미술 평론가 키르스텐 호빙 킨은 이 작품이 한국에서 일어난 "미국의 잔학 행위에 대한 보도"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말했다.[8]
약 109.22cm × 약 208.28cm 크기의 이 작품은 프란시스코 고야의 그림 ''1808년 5월 3일''의 영향을 받았으며, 피카소의 ''게르니카''보다 작지만 개념적 유사성과 표현적 격렬함을 공유한다.[7] ''게르니카'' 및 ''해골집'' (1944–45)과 함께 이 작품은 피카소가 자신의 시대를 묘사하기 위해 구성한 작품 중 하나이다.[9]
3. 1. 도상학적 분석
이 작품은 프란시스코 고야의 1808년 5월 3일과 에두아르 마네의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 연작에서 나타나는 도상학적 전통을 따른다.고야의 '1808년 5월 3일'과 마찬가지로, 피카소의 그림은 두 개의 뚜렷한 부분으로 나뉜다. 왼쪽에는 무덤 기슭에 벌거벗은 여성과 어린이들이 있고, 오른쪽에는 무장한 "기사"들이 서 있다. 이들은 "선사 시대 거인과 유사한 거대한 사지와 단단한 근육"을 가지고 있다. 사격 부대는 고야의 그림처럼 뻣뻣하게 자세를 취하고 있지만, 피카소는 이들을 혼란스러운 모습으로 묘사하여 전쟁의 어리석음을 풍자적으로 표현한다.
병사들의 헬멧은 기형적이며, 무기는 중세 시대부터 현대 시대에 이르는 공격 수단의 혼합물이다. 총도 창도 아닌, 촛대에 가까운 형태를 하고 있다. 또한 병사들은 모두 성기를 가지고 있지 않은데, 이는 왼쪽에 있는 여성들의 임신 상태와 대비되어 생명을 파괴하는 역할을 하는 병사들이 총으로 성기를 대체하여 스스로를 거세하고 다음 세대의 삶을 박탈했다는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9]
4. 영향 및 평가
《한국에서의 학살》은 공개 당시에는 큰 호평을 받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전쟁의 잔혹성을 고발하고 평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작품으로 재평가받고 있다. 이 작품은 피카소의 《게르니카》에 가려져 종종 간과되기도 하지만, 시각적 스토리텔링 면에서는 더 직접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10]
일부 비평가들은 이 작품이 지나치게 직설적이고 단순하다는 이유로 비판하기도 한다. 전시 큐레이터 이자벨 리무신은 이 작품이 "너무 쉽고, 예술가의 동시대인들에게 너무 읽기 쉽다"는 이유로 거부되었지만, "매우 강력한 작품"이라고 평가했다.[10]
4. 1. 사회문화적 의의
바르셀로나 피카소 미술관은 이 그림을 "이념과 입장을 넘어 인간의 권리를 옹호하는 피카소의 가장 중요한 평화주의 작품 중 하나"라고 평가한다.[11] 피카소 전문가 피에르 데이는 이 그림이 "잔혹함의 위대한 전통, 20세기 버전의 《어린이 학살》에 들어섰다"고 평했다.[11]4. 2. 대중문화에 미친 영향
프레디 허바드와 일한 미마르올이 미라이 학살 사건을 다룬 앨범 "Sing Me a Song of Songmy" (1971년)의 앨범 재킷에 이 그림이 사용되었다.5. 2022년 훼손 시도 사건
2022년 10월 9일, 환경 단체 멸종 반란(Extinction Rebellion) 활동가 2명이 멜버른 빅토리아 국립 미술관에 대여된 그림에 순간 접착제로 손을 붙였다. 이들의 손은 그림을 보호하는 플렉시 유리에 붙어 있었지만, 작품에 손상 없이 나중에 제거되었다. 활동가들은 체포되었지만 기소 없이 석방되었다.[12] [13]
참조
[1]
서적
After Modern Art: 1945–2000
Oxford University Press
2000
[2]
서적
Picasso A Retrospective
Museum of Modern Art
1980
[3]
서적
Pablo Picasso, 1881–1973: Genius of the Century
Taschen
2000
[4]
웹사이트
Massacre en Corée (Massacre in Korea)
https://web.archive.[...]
2020-12-28
[5]
웹사이트
Picasso and War
https://www.musee-ar[...]
2019-02
[6]
문서
1987
[7]
문서
[8]
간행물
Picasso's Communist Interlude: The Murals of War and Peace
1980-07
[9]
서적
Propaganda and mass persuasion: a historical encyclopedia, 1500 to the present
ABC–CLIO
2003
[10]
웹사이트
Picasso: The ultimate painter of war?
https://www.bbc.com/[...]
2019-06-20
[11]
웹사이트
Massacre in Korea, the Guernica of the Cold War
http://www.blogmuseu[...]
2020-01-08
[12]
웹사이트
Prized Picasso 'unharmed' after Extinction Rebellion activists glue hands to painting in Melbourne
https://www.theguard[...]
2022-10-09
[13]
웹사이트
ピカソの絵に手を接着 美術館で環境活動家―豪:時事ドットコム
https://www.jiji.com[...]
2022-12-20
[14]
웹인용
한국에서의 학살
https://terms.naver.[...]
2021-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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